2차 전쟁(침입) 이후 거란은 돌아갔지만 고려는 친조(제후국의 왕이 황제국의 황제에게 직접 인사하러 가는 것, 보통은 사신들이 대신한다)를 이행하지 않습니다. 강동 6주를 다시 내놓으라는 거란의 겁박도 있었지만 고려는 꿈쩍하지 않았고 거란 사신을 억류하고 송나라 연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이 시작되지만 우리의 강감찬 장군 상원수(최고 사령관, 71세)를 필두로 온 고려가 하나 되어 흥화진과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을 대파하고 고려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전쟁을 겪으면서 이후 고려는 여러가지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고려거란전쟁 3차 (거란 3차 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69세 백전노장)은 최정예 10만 기병을 이끌고 고려를 3차 침입합니다. 고려도 그동안 거란의 재침입에 만반의 대비를 하며 북쪽 안주에 20만 8300명의 정규군을 주둔하게 합니다.(당시 고려인구 200만~300만 명으로 추산, 10년 동안 고려가 정비된 군사제도의 성과를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숫자임 ) 전쟁초 흥화진 옆 삼교천 전투에서 고려가 먼저 승리를 합니다.
흥화진 근처 삼교천의 좁은 지형에 소가죽과 밧줄을 꿰어 둑을 만들어 거란군에게 수공을 가합니다.
거란군이 흥화진성을 공격하지 않고 지나칠것을 대비해서 여러 가지 방책을 준비해 둔 것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기병 12,000명을 매복시켜 놓음)
이 수공에 대해서는 또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흥화진 전투가 기록상 수공의 원조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위인전에서 수없이 읽었던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야기는 옛 기록에는 언급이 없고 일제강점기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기록이고 당대의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삼교천이라는 천이 거란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정도로 많은 유량을 갖고 있었을까? 전쟁시기가 한겨울여서 한강물도 어는데, 압록강이 얼어서 거란군이 기병으로 침입한 것인데, 천을 막아서 공격했다는 것이 타당한 것인지는 다 시 고려해 봐야 합니다. 역사는 늘 승리한 자의 시각이고 워낙 거란의 침입을 26년간 받다가 3차에서 고려가 승리한 것이니 역사적인 사실에 이것저것 살이 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만큼 고려가 너무 기뻤기에 나온 이야기들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강민첨이 거란군을 추격하여 자주의 내구산에서 크게 패배시켰고 조원이 마탄에서 1만 명의 거란군을 무찌릅니다.
거란은 개의치 않고 개경으로 진격해 나갑니다. 고려군이 지키는 성들을 피해서 계속 남진해 옵니다.(직도전략: 바로 수도 개경을 공격하여 왕을 잡는다) 고려군의 거란군에 대비해 청야 전술을 사용합니다. (청야전술 : 방어군 측에서 자발적으로 주변에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군수물자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이 보급에 한계를 느끼고 지치게 만드는 전술. 군수물자, 식량, 가옥, 수확할 곡식, 우물 등 모든 것을 불태우고 훼손한다) 강감찬은 급하게 개경방어를 위해 김종현장군에게 1만 기병을 주어 급파합니다. 현종은 이번에는 몽진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준비합니다. 소배압은 300명의 정찰기병을 보내는데 고려기병 100명이 밤에 기습하여 몰살시킨다. 이에 소배합은 전세를 정확하게 판단치 못해 개경을 쉽게 공격하지 못하고 회군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개경의 지키는 군사도 없었는데 회군의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추측이 있습니다. 강감찬 장군과 고려의 행운이냐, 거란군의 보급실패냐(거란군 전력은 전투군 정군 1명, 약탈 담당 타 초곡가정 1명, 물품관리와 운반담당 수영포가정 1명, 군마 3 필 배속으로 보급에 철저하게 준비된 군대였으며, 긴급 비상시에는 말 정맥에서 피를 뽑아 영양을 섭취하고 마지막에는 말을 식량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 보급 문제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 소배압의 작전 실패냐(고려 주력군을 두려워해서) 등 등 말입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
고려는 회군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쫓아가 전투를 벌입니다. 마지막 전장이 된 곳은 귀주입니다.
귀주 성은 남, 서, 북쪽 모두 경사가 지고 군사들이 지나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오로지 동쪽은 평지, 평야와 연결돼 있는데 이 평야에서 거란군과 전투를 벌입니다. 기병을 상대로 평야 지역 그것도 거란이 구릉지대를 선점한 상황인데 과연 어떤 전략이 있었던 건지.
전투 초에는 고려군이 맞바람을 맞으며 싸워서 많이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눈도 안 보이고 지휘관의 명령도 잘 안 들리고 활을 쏴도 조준도 어렵고 바람의 저항으로 화살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바람이 바뀌어 거란군이 맞바람을 맞게 됩니다. 시기도 정확하게 개경을 지키러 보냈던 병마판관 김종현 장군이 이끈 철갑기병 1만 명이 거란군의 후미를 공격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말입니다. 이후 대세는 고려, 귀주대첩은 고려의 완벽한 승리였습니다.
"시체가 들을 덮었으며 사로잡은 포로와 노획한 말과 낙타, 갑옷, 병장기를 다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이었으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하게 패배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아났던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거란의 1차 침입이 993년에 시작되고 3차 침입이 1019년 끝이 나는데 오랜 전쟁을 종식한 전투가 귀주대첩입니다. 고려는 더 이상은 거란이 침략하지 못하도록 나라의 온 힘을 다해서 전국의 모든 병력을 모아서 물리친 것입니다. 당시 최강의 제국을 무찌른 대단한 전쟁이었습니다. 이후로 거란은 고려를 절대 침략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강감찬의 나이가 72세이었습니다.
" 현종이 친히 나가 강감찬을 영접하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공을 치하한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꽃 여덟 가지를 강감찬의 머리에 손수 꽂아 준다"
" 왼손을 손을 잡고 오른손으로 잔을 잡아서 위로하고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선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피박 했던 생각나서 불안했는데 다행히 성대히 영웅 대접을 합니다.
몽진을 했던 두 군주의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선조의 몽진은 보신 적 몽진이었다면 현종의 몽진은 강감찬이 사태를 파악해 분석, 선택한 전략적 결단이라고 봐야겠습니다. 현종은 공을 세운 9472명 모두에게 벼슬과 품계를 주고, 전사자는 끝까지 찾아서 그 집안에 물적 지원도 해줍니다. 피해본 지역을 우대하고 새로운 고려를 만들어 나갈 내적 준비를 합니다.
강감찬은 귀주대첩 이후 현종의 곁에서 국정을 돌보았고 83세에는 문신 최고 벼슬 문하시중까지 역임합니다. 1031년 8월 84세로 세상은 뜹니다.
전쟁 이후
귀주대첩 이후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송, 거란, 고려 관계가 새롭게 정립됩니다. 고려는 승리 후 거란에 사신을 보내 책봉-조공 관계 회복을 제안하고 거란이 받아들여 드디어 평화를 찾습니다. 고려가 송과 왕래하는 것 또한 인정받아서 실리 외교를 통해 다원적 국제 질서를 유지합니다. 외교의 주도권을 전쟁의 승리가 가져다준 것입니다. 송, 거란, 고려 사이에 균형이 맞춰지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후에 송은 함께 거란을 공격하자고 고려에 제안하지만 실리가 없다 판단한 고려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한반도의 역사에 이런 통쾌함이 또 언제 있었던가요?
전쟁을 겪으면서 현종의 파천길에 도움을 준 김은부의 세 딸을 왕비로 삼음으로서 폐쇄된 왕실 근친혼의 전통도 깨지기 시작합니다. 현종은 태조의 29번 혼인에 버금가는 13번의 혼인을 통해 왕실을 다시 번성시키고(현종 이후 태조의 피가 끊길 운명) 세 아들이 연이어 왕위에 올라 왕권을 강화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거란에 승리하고 고려인은 자신감에 갖게 됩니다. 스스로 황제국으로 여겨 제도와 격식, 용어를 황제국에 맞게 사용하였습니다. 거란과는 책봉관계, 여진을 조공하는 본국으로 삼으며 이중적인 자기 인식을 갖고 '외왕내제'라는 이중적 자기 인식을 갖게 됩니다. 오로지 명나라 하나만 섬기다 함께 망국의 길로 들어선 조선과 다른 고려 특유의 유연함으로 고려는 11세기 100년 평화와 번영을 구가합니다.
※이야기 보태기
1.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 : 대학교 아님. 별이 떨어진 곳이란 뜻으로 강감찬 장군의 탄생 설화가 깃든 곳임.
2. 체모왜루 : 어린 시절 강감찬을 표현한 말, 체격이 작고 얼굴이 못생겼다. 외모는 부족했으나 재능은 뛰어남.
3. 강은천 : 과거 급제 당시 강감찬(36살에 급제, 당시 과거합격자의 평균나이 24~25세, 문관)의 이름.
고려시대에는 중요한 경험을 겪고 나면 이를 반영해 개명하는 관습이 있었음